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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건설업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020 국내 최초의 건설전문 금융기관 021 서울 몽촌토성(夢村土城)을 비롯하여 삼국시대 이래 수많은 석성(石城)들 을 건설한 바 있고, 특히 조선 인조 때에는 안면반도를 절단하고 수로를 만들어 안면도를 형성하는 대역사(大役事)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대 건설의 역사(役事)에 건설업이라는 산업사적 측면을 동반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 이유는 원시 공동체 사회로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건설은 산업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왕조 시대의 통치에 수반되 는 궁궐 및 성곽의 축조, 사찰의 건립, 농업 생산에 불가결한 치수사업 및 제방 축조 등 부수적인 개념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들 역사는 국가가 직접 관장하는 직영공사의 형태였으며, 국가 는 이를 위해 건설사업에 필요한 모든 기술자를 국가 직속 장인(匠人)으 로 장적(匠籍)에 등록하고, 그 밖의 잡역은 백성들의 노력을 징발하여 사 역하였다. 이를 위해 국가는 건설사업을 전담하는 독립관서를 두고 관리 하였는데 고려시대 선공사(繕工司)와 조선시대 공조의 선공감(繕工監) 등 이 그 일을 맡아 행한 기관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왕조시대에는 근대적인 건설업의 기업형태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근대적 의미의 건설업 역사에 있어서 전환점이자 시발점이 된 시기는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과 이를 통한 강화도 개항이었다. 개항 이후 조 선에는 점차 경험있는 서구 열강의 건축·토목 기술자들이 들어오게 되었 고, 서양식의 주택, 건물, 공장 등 건축시설과 철도, 도로, 교량 등 새로 운 토목시설이 소개되었다. 이후 우리나라의 건설은 건축물, 기술, 사업 방식, 제도 등 모든 방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19세 기 실학적인 사고에 의한 자생적인 변화 추세에서 외국의 근대화된 건설 기술과 방식을 흡수,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으며 이 시기부터 외국의 자본 과 기술이 우리나라 건설산업의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근대적 건설업의 출발은 암울했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 건 설업은 서양의 근대적인 생산·조직 체계와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힘썼으 나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고 만다. 일제강점기의 시작 은 곧 건설업에 있어 자생적 근대화의 중단을 의미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일제의 건설 침략 행위는 노골화되었고 새 로 들어선 조선총독부는 국민들을 무단 동원하며 노동력을 착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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