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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건설업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022 국내 최초의 건설전문 금융기관 023 조선토건협회 따라서 예측하기 힘든 미래에 대한 희망은 작았지만 큰 희망으로 바꿀 대한건설협회의 옛 명칭. 대한건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 바로 오랜 역사에서 나타난 우리 민족의 남다른 설협회는 임의로 발족해 1947년 설립등기를 마친 조선토건협회에 의지와 기술이었다. 뿌리를 두고 있다. 1948년 대한토 건협회로 개칭 후 1959년 대한건 설업회로 법정단체화 했고, 1962 년 대한건설협회로 개칭했다. 광복기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 건설업의 희망을 찾다 1945년 광복은 민족경제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건설업 발전의 역 사적인 전환점이었다. 산업의 영세성, 기술의 낙후성에다 정치·사회적 혼 란까지 겹치면서, 광복을 맞은 이후에도 우리 경제는 여전히 낙후된 상황 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건설업계는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걸음 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느린 걸음이지만, 그것은 먼 훗날을 위한 의미 있 는 걸음이었다. 기술면에서나 자금면에서나 아직은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기는 했지만 광복을 계기로 건설업체들이 속속 창립되었으며, 특히 자 주적인 건설단체를 만들자는 건설인들의 염원을 담아 광복 직후인 1945년 조선토건협회가 창립총회를 갖는 등 우리나라 건설업이 본격적인 여 10월 명기(黎明期)를 맞았다. 광복 후 국내 건설업계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주요 동력은 미군의 주둔이 었다. 미군정청에서 발주하는 주택건설이나 도로공사 등 각종 공사 붐이 일면서, 일제강점기 하에 명맥을 이어가던 건설기능공, 하도급업자, 기술 관료, 기술직·관리직 인력들이 각종 건설업에 투입되었다. 물론 기업으로서의 규모를 제대로 갖춘 건설업체는, 미군정 당국이 귀속 사업체로 처리한 소수에 불과했고, 공사 내용 또한 소규모 공공시설공사 나 구조물의 보수공사에 그치고 있었다. 따라서 광복 이후의 건설업은 보수공사도급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건설업체는 1946년 초부터 1947년 중반까지의 건설경기 호황을 타고 기하급수적으 로 늘어났다. 당시 대부분의 업체가 영세성을 면치 못한 데다 인력과 재 정도 빈약했고, 심지어 건설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가 운데서도 자본과 기술 그리고 건설자재를 갖춘 일부 건설업체들의 경우 미군 발주공사를 기반으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삼환기업·현대토건· 삼부토건 등과 같은 기업들이 후일 국내 건설업체를 대표하는 대기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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