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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대한민국 건설업의 버팀목, 건설공제조합의 큰 걸음 1963 - 1979 뿌리였다. 광복 이후 건설경기 호황을 주도하던 미군 발주공사는 1947년부터 점차 줄어들다가 1948년 4월 전면 중지되었으며, 이로 인해 건설업계는 다시 한 번 큰 혼란을 겪었다. 5월 국내 총선거를 앞둔 시점에 국제 정세 또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만큼 불안정해지자 미군부대 공사에 대한 전 면 중지명령이 내려졌고, 이 때문에 영세업체는 물론 성장일로에 있던 건 설업체들도 심각한 경영난에 부딪혔다. 공사 물량의 절대 부족, 자재난, 자금난이 겹치는 삼중고 아래 건설업체의 파산·해체·전업(轉業)이 줄을 이으며 건설업계는 다시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로 돌아갔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는 1948년 8월 미군정이 물러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 립되며 끝나는 듯 했다. 산업철도, 도로 및 교량 공사, 농지 개량, 수리 사 업 등이 활발하게 이어지며 업계가 다소 활기를 되찾는 것처럼 보였기 때 문이다. 호전되는 분위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1949년에는 업계의 자금난 을 완화하기 위해 대한토건협회가 상호보증융자제도 도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은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고 말 았다. 이후 3년 동안 이어진 전쟁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건설’ 이란 단어는 사라졌다. 단지 ‘파괴’와 그로 인한 상처만이 남은 것이다. 민족상잔의 뼈아픈 시련을 떨쳐내고 대한민국 건설업계는 ‘한강의 기적’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극복의 시대를 맞이했다. 1953년 휴전 이후 본 격화된 전후(戰後) 복구사업은 폐허를 딛고 서는 희망이자 건설업계의 새 로운 기회였다. 아울러 극동아시아 지역과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안전 확 보를 위해 미군이 대량 발주한 군사시설물 공사 또한 분명한 기회였다.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는 건설 수요 아래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건설 붐 이 일었으며, 한편으로는 기술도, 경험도, 자본도, 장비도 갖추지 못한 영 세한 건설업체 난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건설업체의 폭발적인 증가 속에 국내 건설공사비는 가파른 상승 국면을 이어갔으며, 활발한 전후 복구사업에 힘입어 국민총생산 중 건설업 부문 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3년 1.5%에서 1960년 2.1%로 높아졌다. 이 같은 비중 확대는 국내 건설업이 본격적으로 근대적 기업 형태를 갖추는 시기 가 도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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