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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건설업의 급성장과 060 조합 역량의 강화 061 는 1966년 현대건설㈜이 수주하여 1968년 완공한 태국 파타니~나라티 왓 고속도로 공사도 포함되었으며, 이 최초의 해외 진출 공사를 계기로 이후 해외건설 부문도 점차 확대되었다. 해외 건설시장 진출은 건설업 성장의 확실한 촉매제였다. 현대건설㈜의 첫 해외 진출 이후 국내 건설업체들은 그동안 군납 및 차관 건설공사로 축적한 경험을 통해 동남아 시장을 개척해 갔으며, 1965년 10월 베트남 전 참전 이후에는 현지 군 관련 공사에서 특수(特需)를 누렸다. 베트남전 종전(終戰)에 따라 축소된 해외시장의 공백을 메운 것은 1973년 유가 폭 등 이후 폭발적으로 일어난 중동 건설 붐이었다. 그 저력은 1970년대 후 반 우리나라 건설업계가 중동시장을 석권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후일 세 계시장에서 이룬 각종 괄목할 성과의 밑거름이었다. 1970년대는 우리 경제의 공업 기반을 구축하던 시기로서, 이를 위한 생산 1965년 1월에 수주하여 시설 확충이 이어진 것도 건설업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생산 공장과 설비 1968년 2월에 완공한 태국의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의 건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사회간접자본 등으로 인해 건설업계는 유례없는 호황을 맞으며 사업 기반을 굳힐 수 있었다. 건설업체에 대한 면허기준 강화와 함께 경제 성장에 따른 공사의 대형화, 건설기술의 발전 이 이루어졌으며, 건설업체의 내부 성장과 대형화도 이어졌다. 건설업 성장에 따른 관련 법률 및 제도 정비 1962년 제3차 건설업법 개정과 대대적인 업계 정비에 따라 일시적으로 줄었던 건설업체는 그 후 다시 해마다 증가했다. 건설시장의 확대와 건설 업의 신장, 건설업체의 대형화라는 긍정적인 요인 속에서도, 건설업체의 급증은 여러 부작용을 수반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건설공사가 몇몇 대형 업체에 편중 도급되고, 특정 업체들이 부당한 압력을 이용해 지명경쟁 또 는 수의계약으로 공사 계약을 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 공개경쟁의 경우에도 담합 행위가 성행하는 등 부조리가 많았고, 당시 ‘최저가 낙찰 제’의 기준이 지나치게 낮아 경쟁에 의한 낙찰로는 시공을 감당할 수 없 었으며, 이로 인해 담합이 더욱 성행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1963년 5월 31일 면허 발급주기를 연 2회로 한정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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